상봉동 (under construction) works


 상봉동 75-22 3층, 호수가 없는 주소가, 내가 2001년, 집이라고 부르던 장소다. 혹여라도 우리 집에 놀러 갈래? 그런 말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창고 같은 집은, 점점 줄어드는 공간과 달리 줄이지 못한 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뿐인 방문을 열면, 두 식구가 몸을 누일 만큼의 공간에, 빨간색 이불이 항상 펼쳐져 있었다. 홑청이 언제나 얼룩진 그 이불의 모습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난 그 이불이 정말이지 싫었다. 하지만, 뼛속이 시린, 혹한의 계절이 오면, 그것을 동그랗게 말고 몸을 떨다가, 지쳐 잠들곤 했다. 마루라고 부르던 작은 공간에는, 바닥에 놓인 작은 티비, 전축, 그리고 너저분한 세간들, 마지막으로 그때로부터 10여 년 전쯤, 제사상으로 이따금 꺼내 쓰던, 큰 물건이 펼쳐져 있다. 그 집에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무척 큰 물건. 구석구석 하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그 상에는, 언제나 문구류며 청구서 등이 어지러웠다. 가족이 모두 그 앞에 둘러앉는 일은 없었다.

 오늘은 그 상 앞에 세 번째 사람이 앉아 있다. 내가 문을 열었을 때 처음 목격한 그 사람의 등은, 작고 낡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몰랐다.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다시 들어온 문으로 나가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나는 다람쥐처럼 몸을 움츠리고, 그 모습을 등지고, 재빠르게 베란다로 넘어갔다. 마루에서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 언제 됩니까.
- 조금만 말미를 주십시오. 꼭 드립니다. 약속합니다. 요즘 경기가 말도 아닙니다. 죽으란 법은 없지 않습니까...
- 저도 사정을 봐서 최대한 기다려 드린 겁니다. 그런데 여태 한 번도 세를 내지 않으시면서 같은 말만 하시면 어떡합니까.
- 정말 죄송합니다. 거짓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 어디, 사람이 거짓말을 합니까, 돈이 거짓말을 하지. 내 답답해서 내려왔는데 한 번 더 말미를 드리겠습니다.

 가난한 신사들의 대화를, 나는 베란다 너머에서 숨죽이며 들었다.

 이건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빠는 사흘 전인가, 나흘 전에 내게 전화를 해, 당부할 말이 있으니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퇴근길이었다. 그날의 나는 회사 일로 바빠 지쳐 있었고, 퇴근 후에는 그 이상으로 바빴다. 아빠는 회사 근처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시간은 점심이 되어도 좋고, 저녁이면 더 좋고. 주말이어도 괜찮고. 나는 거절했다.

 이틀 전에 아빠는 다시, 내게 전화를 해, 대뜸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니 거기까지는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결혼할 사람은 있냐며. 나는, 마음이 아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얼마? 아빠는 육천만 원을 낼 계획이라고 했다. 놀랐다. 요즘 결혼하려면 일억 이천만 원이 평균이라는 뉴스를 봤다며. 내가 행복하게 가정을 꾸리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쪽은 숫제 감동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삼천만 원밖에 준비를 못 했다고, 불필요한 얘기까지 했다. 오랜만의 대화에 기분 좋아 보이는 음성. 아빠는 나를 이따금 걱정하고, 나는 아빠를 걱정하는 일을 그만둔 지 오래다. 나는 아빠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모르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짐작만 할 뿐이다.

 그래, 그런 얘기는 듣지 않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그 돈이 필요 없다. 나는, 스스로 나의 행복을 이룰 테니 그 돈은 앞으로 보신에 쓰시라고 대답했다. 나보다 더 돈이 필요한 사람은, 언제나 아빠다.

 아빠는 그제야, 내가 잠자코 기다리던 말을 꺼낸다. 며칠 전 당뇨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항상 걸어 다니면서 운동을 적잖게 했으므로 그럴 리가 없는데. 무척 이상하다는 말투로. 게다가 병원에 다니다가 길에서 넘어져 골절상까지 입어, 치료중이라고 한다. 강북 삼성병원에 내야할 돈이 꼭 40만원만큼 모자란다고, 이 돈을 이체해 수 있냐고 묻는다.

 아빠는 부농의 자식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가산은, 탕아인 큰아버지가 사업병에 걸려 탕진했다고 들었다. 농사를 짓기 싫어, 삼촌과 함께 무작정 상경하여, 대학을 다녔고, 중퇴했고, 무역 회사에 들어갔고, 남의 돈으로 사업하는 일을 그만둔 후, 자기 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오파상으로서 아빠는, 처음에는 좋았던 것 같다. 아주 오랜 옛날, 우리가 아파트에 살 때, 집에 89년도 11월 어느 날짜의 동아일보가 열 몇 부 보관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기획 인터뷰 기사로, 아빠가 러시아 시장에서 대단한 성과를 거둬, 그 귀추가 주목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아빠는 그것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며, 딱 한 번, 내게 보여줬다.

 언젠가 내가 우리 아버지에 관해, 깊게 고민한 끝에 정리한 생각을, 전한 일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십 년쯤 전에. 우리는 서로 돈 얘기를 하지 말고, 서로의 행복을 마음으로 빌어주는 사이가 되자고. 그래서 나는 오늘 마음이 아프고, 아빠가 밉다가 그립다가 한다. 차마, 사랑한다고는 말 못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