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불행한 사람 - 심파라네크로메노이에게 한 열광적인 인사 - 금요 집회에서의 폐회사 scraps

 잉글랜드 어디엔가는 훌륭한 기념비나 서글픈 환경 때문이 아니라,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묘비명 때문에 널리 알려진 무덤이 하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무덤을 파헤쳐 보았으나, 시체의 흔적은 찾아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시체가 없었다고 하는 사실과 무덤이 파헤쳐졌다는 사실 중, 어느 쪽이 더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일까? 누군가가 무덤 속에 시체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고생을 하였다고 하는 것은, 아닌게아니라 기이한 일이다.

 가끔 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떤 생활을 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눠보기 위해 무덤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은 생각이 나기도 한다. 하여간에 그 묘비명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어떤 책은 책의 제목 때문에 읽어보고 싶은 마음을 내키게 하는 것도 있지만, 어떤 책은 제목 자체가 책에 담긴 사상을 잘 암시해주고, 또 너무 개인적으로 호소해 오기 때문에 읽을 마음을 내키게 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 묘지명은 각자의 기분에 따라서 불안하고 무섭게 또는 즐겁게 느껴지게도 하겠지만, 자기야말로 가장 불행한 인간이라는 생각에 남몰래 익숙해진 상태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상불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해보지도 않은 사람도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는 무덤 속에 시체가 있는가 없는가를 알아본다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보라! 무덤은 비어있었다! 죽은 자는 부활한 것일까? 그는

 무덤 속에는 평화가 있다.
 거기서 말없이 살고 있는 사람은 비애를 모른다.

라고 노래한 시인의 말을 조롱하고자 한 것일까? 그는 거기서, 즉 무덤 속에서나마 안식을 찾지 못하고, 어쩌면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 것일까? 그는 자기의 거처를 버리고 자신의 주소만을 남겨놓은 것이다! 혹시 아직도 그는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신전의 문과 겸손한 탄원자의 자리를 찾을 때까지 뒤쫓는 복수의 원령도 뒤쫓지 않고, 고통을 마시고 살았고, 무덤까지도 근심이 뒤쫓는 저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친애하는 심파라네크로메노이 여러분, 만약 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면, 십자군의 기사들인 우리는 행복한 동방에 있는 저 성스러운 무덤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행한 서방에 있는 저 비통한 무덤을 찾기 위해서 순례의 길을 떠나기로 하자. 우리는 그 가장 불행한 사람을 저 빈 무덤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를 반드시 찾아낼 것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믿음이 깊은 사람이 저 거룩한 무덤을 보려고 그리워하듯이, 불행한 사람들은 서방에 있는 저 빈 무덤으로 끌리는 것을 느끼고, 각자가 그 무덤이야말로 자기들을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이런 고찰이 우리들의 주의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들의 활동은 우리 협회의 신성한 전통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아포리즘(aphorism)적이고 우연적인 경건함에만 전념하고 있다. 우리들은 단지 아포리즘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포리즘적으로 살고 있다. 우리들은 인생에 있어서의 아포리즘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의 공동체와는 관계없이, 인간들의 슬픔이나 기쁨과는 관계없이 동떨어져서 살고 있다. 우리들의 번잡한 삶의 움직임 속에 끼어 있는 친구들이 아니라, 밤의 고요 속에서 살고 있는 고독한 새들이다. 그래서 어쩌다 한 번씩 삶의 비참함과 낮의 장구함과 시간의 한없는 지속을 곰곰이 생각함으로써 종교적 교화(敎化)를 받기위해 모인다. 친애하는 심파라네크로메노이 여러분, 우리는 행복한 자의 놀음이나 바보들의 행운을 받지 않고, 불행을 구제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믿고 있다.

 보라, 불행한 무리들이 무수히 떼를 지어 몰려오고 있다! 그러나 자기가 초대받고 있다고 믿고 있는 자들은 많지만, 진정 불행한 자로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이들은 분명히 구별되어야만 한다. - 한마디면 무리는 사라진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 즉 죽음을 최대의 불행이라고 생각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불행한 자가 된 사람들은 모두 제외된다. 왜냐하면, 친애하는 심파라네크로메노이 여러분, 우리들은 로마의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는 죽음보다도 더한 불행이고, 다른 무엇보다도 더한 불행인 삶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상 만약 죽을 수 없는 인간이 존재한다면, 만약 저 영원히 방황하고 있는 유대인의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그를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데 주저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무덤이 비어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있다. 요컨대 가장 불행한 사람은 죽을 수가 없는 사람, 무덤 속으로 도망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이다. 실정이 그렇다면 문제는 결론이 난 셈이고, 대답은 쉽다. 왜냐하면 가장 불행한 사람은 죽을 수가 없었던 사람이고, 죽을 수가 있었던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즉, 늙어서 죽은 사람은 행복하고, 젊어서 죽은 사람은 누구나 다 더 행복하고, 태어날 때 죽은 사람은 가장 행복하고, 태어나지 않은 자는 누구보다도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죽음이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행운이고, 가장 불행한 사람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면, 그를 이 보편적인 한계 내에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보라, 무리들이 사라졌고, 사람의 수효도 적어졌다. 나는 이제 새삼스럽게 여러분의 주의를 내게로 돌려달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여러분의 주의가 내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나는 여러분의 귀를 내게로 기울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여러분의 귀가 내게로 기울여져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눈은 빛나고 있다. 여러분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참가해 볼 만한 투쟁이다. 생사를 건 투쟁보다 더 무서운 투쟁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리의 보상은 세상의 무엇보다도 영광스러운 것이고, 보다 확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자는 행운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마지막 순간에 "솔론(Solon), 솔론, 솔론!" 하고 외쳐야만 하는 굴욕을 맛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자유로운 경쟁 경기를 열어보기로 하자. 이 경기에서는 신분이나 연령 때문에 어느 누구도 제외될 수 없다.행복한 자와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제외될수없다. 불행한 자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모든 회원이 환영받고, 참으로 불행한 자들에게는 영예로운 자리가 주어지고, 가장 불행한 자에게는 [승리의 보상으로] 무덤이 주어진다. 나의 음성은 온 세계에 울려 퍼진다."스스로를 불행한 자라 부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나의 음성은 지난 과거의 종족들에게 울려 퍼진다. 우리는 죽은 자가 죽었다고 해서 그들을 제외할 만큼 궤변적이 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한때는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이여, 내가 잠시 동안 그대들의 안식을 방해하는 것을 용서하라." 고 나는 그대들에게 간청한다 "여기 이 빈 무덤 곁에 모이라." 나는 세 번 세상을 향해 외친다 - "불행한 여러분들은 들으라" 고. 왜냐하면 이 문제를 세계의 어떤 외진 구석에서 우리들끼리 결정짓는 것은 우리들의 본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온 세계 앞에서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개의 불행한 원고들의 자격을 심문(審問)하기 전에 우리는 우선 자격 있는 높은 심판관인 동시에 경쟁자로서 자리에 앉기로 하자. 우리는 우리의 사상을 보강하고 달콤한 유혹의 말에 대항할 수 있도록 무장을 하자. 왜냐하면 불행한 자가 자신의 불행에 관해서 말할 때의 목소리만큼 마음에 호소하고 마음을 괴롭게 하는 목소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심판관인 동시에 경쟁자로서 자리에 앉아서, 균형감을 잃지 않고, 개개인의 호소인들 때문에 마음이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왜냐하면 비애의 웅변은 한이 없고 무한한 창의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불행한 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각 그룹마다 한 사람의 대변인 만을 인정하기로 하자. 왜냐하면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개개의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부류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부류의 대표자에게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주는 일에 주저하거나,그가 그 무덤에 속하고 있다는사실을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헤겔의 체계적인 저술들 속에는 각기 '불행한 의식'을 취급한 장(章)이 있다. 우리는 비밀스러운 불안과 두려운 두근거림으로, 그리고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배우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품고 이런 연구를 접하게 된다.불행한 의식이라는말은그것이 우연히 이야기에 끼어들어도, 거의 피를 얼어붙게 하고 신경을 떨리게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강조되어 명백하게 표현되면,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세 번째 호두는 죽음이다(teria nux mors est)" 라는 이야기속에 나오는 신비한 구절처럼, 사람들을 신의 문 앞에 서 있는 죄인처럼 떨게 하기에 충분하다. 아아, 그런 제목의 문장을 쓰느니보다는 그런 것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 자가 행복하리라.오히려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는 자는 더 행복할 것이다.

 "불행한 사람이란, 자신의 이상(理想 Ideal)과 자신의 삶의 내용과 자신의 의식의 충만함과 자신의 존재의 본질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기 자신 바깥에 갖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재(不在)이며, 결코 현존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그러나 인간이 자기 자신이 아닐 수 있는것은 오로지 과거에서가 아니면 미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문장으로부터 불행한 의식의 영역 전체의 윤곽이 당장에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뚜렷이 한계를 지어준 데 대하여 우리는 헤겔에게 감사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왕국을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는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토착민(土着民)으로서 이 왕국에 포함되어 있는 다양한 단계들을 소상히 살펴보기로 하자. 앞의 문장에 따르면 불행한 사람은 부재(不在)라고 한다. 그러나 과거에 살고 있거나 아니면 미래에 살고 있을 때 그는 부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표현의 방식을 엄밀하게 유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언어학(言語學)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듯이, 과거를 말할때도 현재적으로 표현하는 시제(時制)가 있고, 미래를 말할 때도 현재적으로 표현하는 시제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언어학은 어떤 현재적인 것도 내포하지 않는 과거완료라는 시제와 역시 마찬가지의 성격인 미래완료라는 시제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제 세상에는 희망으로 살고 있는 개인들이 있는가 하면, 회상 속에서만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한에 있어서, 즉 그들이 희망 속에서만 살고 있거나 회상 속에서만 살고 있는 한에 있어서 그들은 미상불 어떤 의미에서는 불행한 개체들이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하여 현존하는 사람만이 행복하다고 하는 뜻에서 말이다. 그러나 매우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희망이나 회상 속에서 현존하는 사람은 불행한 개체가 아니다. 여기서 강조해 두어야 할 점은, 희망이나 회상이라는 의식 형태 속에서 자기 자신이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우리는 또 한 번의 운명적 충격은, 그것이 제아무리 엄청난 충격이라고 해도, 사람을 가장 불행한 자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한 번의 충격은 사람으로부터 희망을 빼앗아 그를 회상 속에서 현존하게끔 하든가, 아니면 회상을 빼앗아 그를 희망 속에 현존하게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불행한 개체를 좀 더 소상히 기술해 보기로 하자.

 우선 우리는 희망하며 사는 자를 고찰해 보기로 하자. 희망하는 개체로서의 (물론 그런 한에 있어서 그는 불행하다.) 그가, 희망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현존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는 좀 더 엄밀한 의미에서 불행해진다. 영원한 삶을 희망하는 개체는, 그가 현재적인 삶을 단념하고 있기 때문에 실망 어떤 의미에서는 불행하지만, 그는 희망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현존하기 때문에, 또 세속적 삶의 개개의 여러 계기와는 갈등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불행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인간들에 이 희망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현존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되고, 자신의 희망을 잃었다가는 다시 희망하고, 희망하였다가는 다시 잃는 일을 끝없이 되풀이하게 되면, 그럼으로써 현재라는 시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미래라는 시간에 있어서마저도 자기 자신에게 부재(不在)하게 되면, 우리는 이러한 사정에서 불행한 자의 한 유형을 보게 된다. 회상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도 사정은 같다. 만약 그가 과거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현존하고 있다면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불행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그렇지 못하고, 과거라는 시기에 있어서 항상 자기 자신으로서 현존하고 있지 못하고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아의 외부에 존재하는 경우에,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유형의 불행한 인간을 본다.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특히나, 회상은 불행한 인간의 삶의 진정한 요소이다. 왜냐하면 과거는 지나가 버린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는 것이라는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가 과거보다 현재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희망으로 사는 사람이 미래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미래가 실재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희망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자기에게 도저히 실재성이 될 수 없는 미래를 가지려고 하거나, 혹은 회상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무런 실재성을 갖지 못하였던 과거를 회상하려고 한다면, 그때 우리는 본질적인 의미의 불행한 개체들을 갖게 된다.
 사람들은 전자의 상정(想定)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거나 순전히 광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희망하는 개체는 자신에게 실재성이 없는 어떤 것을 희망하지는 않지만,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어떤 것을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개체가 희망을 잃고도 회상 속에서 피난처를 찾는 대신 희망하는 일을 계속할 때, 우리는그런 유형을 갖게 된다. 자신의 회상을 잃은 어떤 개체가, 혹은 회상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개체가 희망하는 개체가 되려고 하지 않고 계속 회상하는 인간이 되려고 할 때, 그때 우리는 하나의 불행한 유형을 갖게 된다.

 이렇듯이 만약 어떤 개체가 고대나 중세나, 혹은 어떤 다른 시대 속에 파묻혀서 그것이 그에게 어떤 결정적인 실재성을 갖게 되면, 혹은 또 만약 그가 자신의 소년시절이나 청년시절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게 되어서, 이런 것들이 그에게 어떤 결정적인 실재성을 갖게 되면, 그때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불행한 개체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유년시절을 갖지 못한 사람이, 이제 어쩌다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어서 유년시절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래서 이제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고 항상 유년시절만을 돌이켜 바라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보면, 그때 우리는 이런 불행한 사람의 전형적인 실례를 갖게 된다. 그는 뒤늦게 자기에게 지나가 버린 것이 된, 그러나 그가 여전히 회상 속에서 의미를 찾아보려고 하는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약 삶의 즐거움이나 향락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살아왔으나, 이제 임종의 침상 그런 것들에 대해 눈을 뜬 사람이 있다고 하고, 또 그가 가장 다행스러운 일에 속하는 죽음을 맞이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살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은 누가 가장 불행한 사람인가를 심사하는 우리의 심사회에서 당연히 고려의 대상이 될 것이다.

 희망으로 사는 사람의 불행은 회상 속에 사는 사람의 불행처럼 고통스럽지는 않다. 희망으로 사는 사람은 그래도 종종 견디기가 수월한 환영 속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회상 속에 사는 불행한 개체 속에서 찾아야만 한다.

 좀 더 앞으로 나아가 보기로 하자. 이미 앞에서 언급한 두 개의 보다 엄밀한 의미의 불행한 유형을 합친 것을 상상해 보기로 하자. 희망으로 사는 불행한 사람은, 회상 속에 사는 불행한 사람이 자신의 회상 속에서 현존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없듯이, 자신의 희망 속에서 현존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 두 유형의 결합은 다음과 같이 가능하다. 회상이 불행한 개체가 자신의 희망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을 방해하고, 또 반대로 희망이 그가 자신의 회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을 발견할 때가 그때이다. 한편으로 보면, 이런 일은 그가 회상해야만 하는 것을 항상 희망할 때 생긴다. 요컨대 그의 희망은 항상 그를 실망시킨다. 그러나 그의 희망은 그를 실망시키는 일을 통해서, 그의 희망의 실현은 연기된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희망은 지나가 버렸으므로 이미 체험되었거나 체험되었어야만 했기 때문에 이제 그것은 회상 속으로 옮아갔다는 사실을 그에게 드러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