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의 순간을 기다리던 잡일들 daily

 1. 귀국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보험이 끝났다. 그동안 낮을 밤처럼 지냈다. 그럼 밤을 낮처럼 활용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밤낮으로 잠만 잤다. 런던에서 열 시간씩 자면서, 피로가 꽤 누적되었구나, 생각했는데 그때는 오히려 쭉 긴장 상태였던 것 같다. 지금까지 아무리 피곤해도 아침 열 시 넘어서 못 일어난 적이 없는데, 눈을 뜨고 시계를 확인할 때마다 마주하는 숫자가 무척 어색하다. 불안한 나에게 스스로 조언한다면, 그냥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씩 해나가라고 할 것이다. 나는 그 조언에 따라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했고, 첫 번째 과업인 보험이 끝났지만, 조언을 한 사람이 별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지 자꾸 조바심이 난다. 하나라도 더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미처 상상도 못 했던 그런 굉장한 계획을 세워서 실천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고 보면 인도에서의 마지막 석 달은 매일 짧든 길든 계획을 세우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것은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이따금 엿볼 수 있는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는 순간이 무척 즐거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인도에서의 생활이 나름 안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는 얘기도 된다. 여기서는 참 많은 것들이 생소하다. 우습게도, 한국에 오래 살았음에도, 비교적 찰나와 같은 해외 경험이 많은 것들을, 내 예상과는 다르게 만든다. 그래서 누적된 모든 계획은 무시되거나 보류중이다.

 2. 간밤에 보험 서류 완비를 자축하며, 여유가 생긴 김에 저녁을 먹고 시내의 극장에 갔다. <미스 슬로운>은 제시카 차스테인이 등장하기 때문에 인도에서부터 개봉을 기다리던 영화였다. 그러나 그가 등장한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았으므로 사실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비슷한 조건에서 에밀리 블런트가 나오는 영화를, 잔뜩 기대하고 봤다가 실망한 경험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생생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마치 폭풍과 같이 몰아친 마지막 한 달, 단 하루도 극장에 갈 여유가 없었고, 인제야 한국에 개봉한 것을 보러 간 것이다. 영화는 정말 좋았다. 어딜 가면 저렇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글로벌 대기업에는 그런 비슷한 사람조차 없던데. 주변의, 다른 관객들은 하나둘씩 잠들어 규칙적이며 불규칙한 숨소리를 뱉어냈다. 이 영화를, 보편적으로 두루 인정받을만한 명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영화는 개인적 취향에 강하게 부합하여, 특정 개인에게는 명작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작품이 몇 있는데, <미스 슬로운>은 현재 그 리스트 마지막에 꼿꼿이 자리 잡고 섰다. 즐거움이 충만한 하루였다. 이런 기대 밖의 명작을 만나는 것이, 달에도 몇 번씩, 수준 미달의 쓰레기들을 기꺼이 감내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