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CRAFT daily

 나는 요즘 산티아고 순례길에 푹 빠져있다. 걷는 여행에 관한 환상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 비슷한 것이라도 하나씩 추척해 보자면, 고등학교 2학년 어느 침착한 오후 TV에서 본 박카스 국토대장정 다큐멘터리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한 해를기다려 같은 프로그램을 한 번 더 봤고, 새내기가 되어 지원했고,떨어졌으며 다시는 지원하지 않았다. 이베리에 반도에서 성인의 자취를 쫓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걷는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파울로 코엘료 소설을 읽고 나서였다. 그리고 또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요컨대, 성자의 자취를 좇는 일, 그것이 내게는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인도 생활을 정리하게 되었다. 삶의 터전을 외국으로 옮긴다는 것은, 자신의 영역을, 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발상 자체만으로도 큰 도전이었고 그것은 실제로도 지난한 경험이었다. 그동안의 모든 어려움과 기쁨을, 나의 일부로서 소중하게 여기고 싶은 만큼 그 끝을 잘 정리하고 싶다. 그것이 며칠간, 남의 여행기를 틈틈이 찾아보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델리에서 깐야꾸마리까지 걷는 방법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객사할 것 같다. 시코쿠 헨로미치, 국토대장정, 지리산 종주, 제주도 올레길까지 걷기 키워드로 조사를 해 봤으나, 나와는 먼 얘기처럼 보였다. 무엇보다도 나는 익숙하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환경을 경험하고 싶다. 나는 남유럽에 가 본 일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산티아고에 갈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복잡한 일상, 앞으로의 계획, 세밀하게 짜인 계획 혹은 촘촘해야만 하는 그것이 나를 두렵게 만든다. 꽤 노선에서 이탈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평할 때도 왕왕 있지만 멀리서 보면 나 역시 조금은 덜 붐비지만, 같은 철로 위를 걷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친구에게, 대학 때 뭘 했는지 모르겠다, 넉넉잡아 3백만 원만 쓰면 방학 때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 너무 아쉽다.고 얘기한 것이 지난주 일이다. 그때 뭘 했나 돌이켜보니 찜닭을 팔거나 교육청에 들어가서 알바를 하거나 대외활동을 하고 있었다. 즐거운 날들이었다. 허투루 시간을 낭비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가지지 못했던 것이, 시간이 흐른 지금 아쉽다.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꼭 가겠다는, 자기 주술적 확신이 무의미하다는 점을, 나는 이해한다.

 오전에 커트를 하고 이삿짐을 조금 옮겨놓은 다음, 영화를 보러 갈까 하다가, 마음먹은 대로 잘되지 않아, 조금 고민하다가 근처 쇼핑몰에 나갔다. 3년 전에는 거의 주말마다 드나들던 곳이다. 하지만 입구에 내렸을 때, 오늘 갔다 돌아오면, 앞으로 평생 그곳에 가는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나는 지하부터 꼭대기까지 천천히 걸으며, 옛 기억을 되살리다가, 콜롬비아 매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혹시 하이킹 물품 같은걸 팔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인도를 찾는 여행객 중 상당수가 네팔 혹은 인도 내의 히말라야 자락을 방문하고, 또 서쪽에도 널리 알려진 산악 관광지가 있지마는, 신기하게도 델리에서 양질의 등산 혹은 하이킹 브랜드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콜럼비아에는 그냥 그렇고 저런 물건들이 조금 있었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또 조금 걷다 보니 와일드크래프트 매장이 나타났다. 매장 밖에서 안쪽을 기웃거리다 보니 직원이 나와 들어오라고 눈짓한다. 인도의 일을 정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면, 하나쯤은 인도 물건을 지니는 것도 좋지 않을까, 마침 그동안 봐둔 여행기에 등장할법한 가방이 눈에 띈다. 들어가서 물건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확장은 가능한지 물었는데, 놀랍게도, 그 가방은 어떠한 확장성도, 한국 사람들이 까미노를 걸을 때 으레 쓰는 트레킹용 배낭이 가진, 어떠한 편의 기능도 없는, 단순한 것이었고 가격 또한 놀랍게도 저렴했다. 4천 루피, 복잡하고 비싸고, 또 힘든 여정을 수월하게 만들어줄 여러 기능이 없더라도, 어쩌면 이 배낭이 내게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2주 정도만 더 이런 생각을 했다면 디왈리 할인 기간에 덜컥 이삿짐을 늘렸을지도 모른다. 아마 나는, 그런 이유에서 그 가방을 사거나 혹은 사지 않게 될 것이다.

 다음 주에는 데카트론에 가 봐야겠다.